얼마 전 아가씨와 토론을 하다가 "세벌식 사용자들은 자꾸 '전도'를 하려고 해서 싫어"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.
나는 세벌식 유저이다. 두벌식보다 세벌식 자판이 더 좋은 자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판을 바꾼 사람이다. 이는 각종 글을 칠 때 발생하는 여러 통계적 수치와 손가락의 분산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내린 판단이다. 물론 컴퓨터를 처음 익힐 때는 많은 키 수와 복잡한 배열로 인해 고생하겠지만, 어차피 키보드는 배열을 익히고 나면 머릿 속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몸에 익어 글쓰듯 쓰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.
인데, 키보드를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해 보았을 때 과연 어떤 자판이 더 괜찮은 자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.
일단 지금 현행의 두벌식 키보드 표준은 정부가 그냥 <세벌식 자판이 있긴 한데, 글꼴이 안 이뻐> 하고 세벌식 갖다 버리고, 몇 개월정도 개발해다 지정한 표준이라 영 맘 에 안 드는게 사실이다(..) 근데 이게 또 보면 이 사람들도 그냥 월급도둑은 아닌지라, 나름 이유를 가지고 자판배열은 해 놨다. 울림소리가 키보드 중앙, 된소리계가 키보드 윗줄, 거센소리 계가 키보드 아랫줄이 자음 배열이고, 모음 배열도 나름 보기좋게 배열 해 놓았다. 뭐 보기 좋고 깔끔하고, 키배열이 딱 리즈너블 하고, 키 개수도 좋고, 자음+모음 구성이라 나름 한글 구성에 맞긴 하다. 디자이너들이랑 정부 고관들이 좋아할 만 한 키보드 배열이다. 별로 할 말이 없네(..)
세벌식 자판은 뭐냐 하면, 초성 중성 종성을 다 나눠 놓은 자판이다. 보다시피 복잡하다. 키도 많고 헷갈린다. ㄱ 만 찾아봐도 ㄱ(초성), ㄱ(종성)이다. 게다가 쌍기역 받침(ㄲ)은 ㄱ 받침 위치랑 또 다르다. 게다가 숫자키까지 쓴다. 손가락 움직이는 폭도 더 넓어보인다. 두벌식은 세 줄만 왔다갔다 하면 되는데 세벌식은 네줄 왔다갔다 하느라 바쁘다. 게다가 ㅗ 랑 ㅜ 는 또 오른손으로 치는게 있고 왼손으로 치는게 있다. (9 랑 / 위치의 ㅗ,ㅜ 와 v, b 의 ㅗ,ㅜ) 한마디로 죽어라 복잡하다. 외우느라 한세월 걸리겠다(사실 두벌식 자판 외워서 그리라면 그리겠는데 세벌식 자판 외워서 그리라면 헷갈린다). 근데 장점이 많다. 초 중 종성 다 구분해놔서 기계적으로 오토마타 짜기도 편하고, 모아치기도 되고, 입력하는 키 횟수가 적은데다가 쉬프트 누르는 횟수도 적어서 똑같은 시간을 투자하면 두벌식 치는 거 보다 세벌식 치는 게 훨씬 빠르댄다. 뭐 장점 많다. 처음 접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익히고 나면 두벌식보다 훨씬 좋댄다. 키 배열이 이리 복잡한 이유는, 공병우 박사님이 계속 필드 테스트 해가면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칠 수 있는 자판 배열 찾다 보니까 이리저리 키 옮기고 해서 저런 배열이 됐댄다. 키보드 가지고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랑 필드 테스트만 몇년 한 자판이라 효율성 하나는 죽인댄다. 이모티콘 쓰기는 좀 어렵다. 특수문자 계열이 영문이랑 달라서 뭐 입력하려면 영문키 눌렀다 왔다갔다 바쁘다.
대충 종합해 보면 두벌식 자판은 보기 깔끔하고 간편한 일반 모드, 세벌식 자판은 강력한 파워유저 모드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. 뭐 세벌식이 조금 더 익히기 힘들긴 하다. (근데 생각해보면 의외로 비슷할거 같기도 한게, 어차피 키보드에 그려져 있는 그림 보고 키 누르는게 똑같다고 치면 처음 배울땐 세벌식이 더 헷갈리겠지만 실제로 타자를 익혀서 일정한 타수에 도달하는 시간 자체는 둘 다 비슷할 것 같다.)
이 문제의 근본은 한글에 대한 이념 차이이다. 난 전반적인 잠재력과 한글의 본래 창제 이념에 있어 세벌식이 훨씬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여 세벌식을 선택한 것 뿐이고, 최초에 접근하기 편한건 두벌식이다.
당신이 만약 최초에 컴퓨터를 익힌다고 가정하면 어떤 자판을 선택할 것인가?